재회

지독하게 질긴 인연의 끈이었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몇 가지 지우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을 이정표 삼아 마침내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우리는 푸른 추억이 시작되었던 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다시 마주 앉았다. 준우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짐짓 덤덤하게 물었다. “유부녀가 어떻게 이 평일 저녁 시간에 … Read more

편지

집으로 돌아와 최대한 냉정하게 써 내려갔던 그 편지에 어떤 말을 채웠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간절했던 마음이 전달되었던 것일까, 얼마 후 또 다른 낯선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준우의 군대 선임이라고 했다. 그는 내게 괜찮다면 서울 인근의 도시로 한 번 와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러마고 답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남자는 … Read more

면회

준우가 군대에 가고 얼마쯤 지났을 때였다. 집으로 낯선 남자의 생경한 목소리가 전화를 걸어와 나를 찾았다. “누구세요?” “저, 혹시 군대 보낸 친구가 있지 않아요?”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자기에게 전화를 부탁한 친구의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면회를 한번 오라는 것이었다. 참 황당한 전화였지만, 내 직감은 그것이 준우의 소식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나는 이듬해 … Read more

입영열차

결과적으로 선착순이네 어쩌네 하며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입대하는 준우를 배웅하기 위해 나는 기어이 청량리역 플랫폼으로 향했다. 역전은 군대로 떠나는 청춘들과 그들을 붙잡고 우는 가족, 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매연과 눈물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배웅은 청량리역 플랫폼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준우, 그리고 경철이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과 함께 청량리발 입대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달리는 … Read more

사진

표현에 인색했다. 내게도, 준우에게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빤히 알면서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어 확인받는 일에는 지독하리만치 인색한 연인들이었다. 언젠가 퇴근 무렵, 준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뜬금없이 명동으로 오란다.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큰소리를 땅땅 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명동 명물인 전기구이 통닭집에서 마주 앉았다. 노릇하게 구워진 통닭을 뜯으며 내가 이유를 물었더니, 준우가 짐짓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장학금을 받았다고 … Read more

확인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은 나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준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버렸다. “도대체 그 친구에게 나를 뭐라고 말한 거야? 우린 대체 어떤 사이야?” 내 서슬 퍼런 질문에 준우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경철이가 너 좋아하잖아. 몰랐어?”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가슴이 쿵 내려앉았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경철이의 마음을 정말로 … Read more

오월 축제

사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뒷걸질을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느리게, 하지만 아주 확실하게. 5월이 되자 뭔가 이상했다. 대학의 꽃이라는 축제 기간이 분명한데도 준우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토요일이었던 축제 당일, 나는 평소에는 잘 입지도 않던 치마까지 정성스레 챙겨 입고 출근을 했다. 은근한 기대를 품은 채 퇴근 … Read more

다시 봄

언제나 그러하듯, 주말이나 시간이 날 때면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준우의 학교 앞으로 향했다. 낮에는 회사원으로 치열하게 살다가도, 그곳에만 가면 다시 철없는 스무 살의 청춘으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준우의 단골 골목을 서성이다 보면 우연히 그의 과 선배들을 마주치기도 했고, 스스럼없는 과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합류해 어울리기도 했다. 그 시절 청춘들의 술상에는 으레 … Read more

그해 겨울

어쨌거나 폭풍 같던 시험은 끝이 났다. 거대한 목표 하나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가방을 메고 출근하는 회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의 활시위가 느슨하게 풀려버린 채, 나는 멍하니 성적표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내 손에 쥐어진 성적표의 숫자는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평소 객관식에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