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미팅이 참 재미있었다. 단지 어수선한 시국을 잠시 잊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스무 살 특유의 설렘 때문이었을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주르륵 마주 앉아 숨을 죽였다. 남자아이들이 주머니에서 각자의 사연이 담긴 소지품을 하나씩 꺼내놓으면, 여자아이들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는 소지품 미팅이었다.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어 들었고, 그렇게 내 파트너가 결정되었다. 그 아이는 수도권의 한 대학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며 연기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첫눈에 보기에 주인공 역할을 맡을 법한 화려한 인물은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개성파, 한마디로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그런 과의 아이였다. 그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내게 연극 티켓 한 장을 내밀었다. 자기가 나오는 공연이니 꼭 보러 오라고 했다. 얼마 후, 어두컴컴한 소극장 관객석에 앉아 그 아이의 무대를 지켜보았다. 연극 제목이 <아일랜드>였던가. 정확히 다 기억나진 않지만, 황량한 섬 같은 곳을 배경으로 단 두 명의 출연자만 등장하는 기묘하고 묵직한 2인극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죄수복을 입은 두 사람이 절규하듯 독백을 이어가며 막이 내렸던 것 같다. 화창한 오월의 낮거리와 극장 안의 어두운 조명, 그리고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죄수를 연기하던 그 미팅 파트너 아이의 얼굴. 지금 생각하면 참 이름도 얼굴도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그 시절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뜨겁게 스무 살을 채워가고 있었다.그 연극반 친구를 따라 서울 인근의 한 공단 지역에 있는 작은 소극장으로 향했다. 어둡고 비좁은 그곳에서 마주한 공연은 내게 거대한 충격이었다. 정확한 가사는 다 기억나지 않지만, 무대 위에서 흘러나오던 노랫말들은 스무 살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처절했다. "사장님 강아지는 벤츠 타고 병원 가고요, 우리는 손가락이 미싱에 잘려도 아까징끼를 바르고 일을 하지요." 가슴이 쿵쾅거렸다. 화창한 종로거리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땀 흘리는 이들의 현실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다음 주였던가. 이번엔 명동엘 갔다. 참새가 방앗간을 들르듯 명동도 갔다가, 종로에도 놀러 갔다가 하던 눈부신 젊은 시절이었다. 북적이는 명동 거리에서 문득 눈에 확 띄는 얼굴이 보였다. 얼마 전 종로 지하 다방에서 이름도 모른 채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어머?!"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각자 일행이 있었기에, 조만간 회사 근처에서 다시 만나기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 종로에서 만났던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내 어깨를 쳤던 아이의 이름은 승열이었고 K대생이었다. 그리고 함께 있던 준우와 기현이는 S대생으로, 세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기현이가 슬쩍 준우를 놀리기 시작했다. "얘는 얼마 전에 사진 찍으러 갔는데, 사진사 아저씨가 '얘야, 눈 좀 떠라' 그랬대."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준우는 눈이 참 작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말을 툭 던져버렸다. "난 눈 작은 사람이 좋더라. 눈 작고, 안경 쓰고, 키 크고, 마른 사람." 말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준우가 딱 그랬기 때문이다. 눈이 작고, 안경을 썼고, 키가 컸으며 말랐다. 물론 내 어깨를 친 건 승열이었고 명동에서 다시 만난 인연도 승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겐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 사이에 승열이와 밥을 한 번 먹긴 했지만, 정작 내 신경은 온통 준우에게 쏠려 있었다. 난 준우가 궁금했다. 기다리던 토요일, 퇴근길에 그가 알려주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고 준우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엔 반가움과 당황함이 가득 묻어났다. "어! 전화 받고  너무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지금 양말도 못 신었어." 그냥  왔어,    응   기다렸어  우리의 진짜 이야...
 오월의 어느 일요일, 갓 졸업한 후배와 영화를 보고 나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창한 오월의 햇살이 쏟아지는 종로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도 정말 많았고 날씨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는데, 극장 문을 나선 거리의 공기는 왠지 모르게 휑하게만 느껴졌다. 인파 속에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던 그 기묘한 느낌.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는, 그저 달콤하게 연애만 하거나 평범하게 일만 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을 산 것이 아니었다. 지독했던 오월의 봄. 퇴근길이면 여기저기서 펑, 펑,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종로 하늘을 뒤덮었고, 사방을 가득 채운 매케한 냄새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도저히 정상적으로 걸을 수도 없는 길을, 우리는 매일같이 꾸역꾸역 걸어서 집으로 가야만 했다. 유난히 화창했던 일요일의 햇살과, 매일 저녁 거리를 가득 채우던 매케한 최루탄 연기. 그 아득한 공기 속으로 나와 후배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시국은 한없이 어수선한 시절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날씨만큼은 유난히 화창했고 우리는 눈부신 스무 살이었다. 영화가 끝났지만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는 괜히 싫은 날이었다. 우리는 목적지도 없이 종로거리를 걸었고,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젊음의 열기로 북적이고 있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영숙이 아냐? 와, 오랜만이다!" 돌아보니 낯선 얼굴이었다. "어, 아니에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머쓱해하며 돌아서려는데, 그 남자가 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사실... 친구들이랑 내기를 했어요. 그쪽처럼 멋진 분을 데려오면 커피를 사기로 했거든요. 잠깐만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슬쩍 보니 키도 훤칠하게 크고 인상도 제법 괜찮았다. 혼자였다면 칼같이 거절했겠지만, 옆에 있는 후배를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종로에 있는 아주 커다란 지하 다방으로 들어서려는데, 저 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