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어느 일요일, 갓 졸업한 후배와 영화를 보고 나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창한 오월의 햇살이 쏟아지는 종로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도 정말 많았고 날씨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는데, 극장 문을 나선 거리의 공기는 왠지 모르게 휑하게만 느껴졌다. 인파 속에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던 그 기묘한 느낌.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는, 그저 달콤하게 연애만 하거나 평범하게 일만 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을 산 것이 아니었다.
지독했던 오월의 봄. 퇴근길이면 여기저기서 펑, 펑,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종로 하늘을 뒤덮었고, 사방을 가득 채운 매케한 냄새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도저히 정상적으로 걸을 수도 없는 길을, 우리는 매일같이 꾸역꾸역 걸어서 집으로 가야만 했다.
유난히 화창했던 일요일의 햇살과, 매일 저녁 거리를 가득 채우던 매케한 최루탄 연기. 그 아득한 공기 속으로 나와 후배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시국은 한없이 어수선한 시절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날씨만큼은 유난히 화창했고 우리는 눈부신 스무 살이었다. 영화가 끝났지만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는 괜히 싫은 날이었다. 우리는 목적지도 없이 종로거리를 걸었고,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젊음의 열기로 북적이고 있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영숙이 아냐? 와, 오랜만이다!"
돌아보니 낯선 얼굴이었다. "어, 아니에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머쓱해하며 돌아서려는데, 그 남자가 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사실... 친구들이랑 내기를 했어요. 그쪽처럼 멋진 분을 데려오면 커피를 사기로 했거든요. 잠깐만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슬쩍 보니 키도 훤칠하게 크고 인상도 제법 괜찮았다. 혼자였다면 칼같이 거절했겠지만, 옆에 있는 후배를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종로에 있는 아주 커다란 지하 다방으로 들어서려는데, 저 멀리서 그의 친구라는 녀석 두 명이 반갑게 뛰어왔다. 어쩌다 보니 낯선 이들과 다방 테이블에 둘러앉아 묘한 합석이 시작되었다.
"두 분은 무슨 사이세요?" 어색한 공기 속에서 누군가 툭 던진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제가 선배고, 이쪽은 후배예요."
그러자 내기를 걸었던 그 남자가 멋쩍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는 재수를 해서 이제 막 입학한 대학 1학년이고, 같이 온 친구 두 명은 제때 입학해서 벌써 2학년이란다.
어수선했던 오월의 일요일 오후, 매케한 최루탄 연기 대신 쌉싸름한 커피 향이 감돌던 지하 다방. 우리는 그럭저럭 싱거운 대화 몇 마디를 나누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 그렇게 쿨하게 헤어졌다.
스무 살의 종로거리는 그렇게 휑하다가도, 때론 뜻밖의 온기로 채워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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