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러하듯, 주말이나 시간이 날 때면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준우의 학교 앞으로 향했다. 낮에는 회사원으로 치열하게 살다가도, 그곳에만 가면 다시 철없는 스무 살의 청춘으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준우의 단골 골목을 서성이다 보면 우연히 그의 과 선배들을 마주치기도 했고, 스스럼없는 과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합류해 어울리기도 했다.
그 시절 청춘들의 술상에는 으레 저렴하고 쓴 소주병이 줄을 지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이 잔 가득 소주를 채워 마실 때도, 고집스럽게 혼자만 톡 쏘는 맥주를 주문해 마시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썩 유세 떠는 것처럼 보이는, 참 ‘재수 없는 아이’였던 것 같다. 물론 취향이란 건 쉽게 변하지 않는지, 나이를 먹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소주의 그 독한 알코올 향이 싫다.
그러던 어느 날, 준우가 평소 안 보이던 낯선 친구 한 명을 데려와 소개했다. “같은 과이긴 한데 원래 잘 몰랐거든? 근데 최근에 부쩍 친해진 친구야.”
참 순해 보이는 인상의 아이였다. 준우의 소개를 계기로 그 친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아지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셋이서 만나는 날이 늘어났고, 우리는 꽤 자주 어울리는 삼총사가 되었다. 맛있는 밥을 먹으러 다닐 때도, 가볍게 술잔을 기울일 때도 그 친구는 늘 준우의 옆자리, 혹은 내 맞은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묵묵히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잔을 채워주던, 참 편안하고 좋은 친구라고만 생각했다.
운명의 그날도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준우의 학교 앞 낡은 술집 골목을 찾았다. 아주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나오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작은 주점이었다. 가게 안에는 고작 테이블이 두 개밖에 없을 정도로 비좁았고, 사방이 온통 검은색 벽지로 도배되어 있어 마치 세상과 단절된 은밀한 골방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을 겨우 밝히고 있는 것은 테이블 중앙에서 미약하게 일렁이는 작은 촛불 하나가 전부였다.
어둠과 촛불이 만들어낸 묘한 분위기에 취해갈 때쯤, 준우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웠다.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준우가 나가고, 좁은 테이블 위에는 타들어 가는 촛불 소리만 들릴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검은 벽면 사이로 흐르는 침묵이 어쩐지 어색해 내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내 맞은편, 어둠에 반쯤 가려져 있던 그 친구가 촛불 너머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툭, 한마디를 던졌다.
“처음엔 보고 싶었구…… 나중엔 잊기로 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준우의 친구로서 마주했던 그 수많은 시간 동안, 그가 촛불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홀로 삼켜왔을 수많은 감정의 파편들이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담겨 내 가슴으로 사정없이 날아와 박혔다. 준우가 없는 단 몇 분의 찰나, 어두운 골방의 촛불이 일렁였고, 나는 몰라야 했던 그의 비밀을 마주한 채 얼어붙어 버렸다. 평화롭던 우리의 스무 살 삼각 구도에, 서늘하고도 뜨거운 균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