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어쨌거나 폭풍 같던 시험은 끝이 났다.

거대한 목표 하나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가방을 메고 출근하는 회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의 활시위가 느슨하게 풀려버린 채, 나는 멍하니 성적표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내 손에 쥐어진 성적표의 숫자는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평소 객관식에 강하다며 큰소리를 쳤던 것에 비하면, 엉덩이가 가벼웠던 수험생의 결과물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성적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언니는 한숨을 푹 쉬며 톡 쏘아붙였다.

“야, 이 성적을 가지고 도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니?”

말은 그렇게 구박을 하면서도, 언니는 그날부터 나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성적으로 지원 가능한 학과와 학교가 있는지, 두꺼운 입시 책자가 닳도록 뒤적이며 수소문을 했다. 심지어 언니는 제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시간까지 교묘하게 짜 맞추어 가며, 서울 시내의 이 학교 저 학교를 직접 발품 팔아 돌아다녔다.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데이트를 겸해 동생의 원서 접수를 하러 다니던 언니의 뒷모습은, 툴툴거리던 말투와 달리 자매라는 끈질긴 인연이 아니고선 보여줄 수 없는 깊은 다정함이었다.

언니의 눈물겨운 대리 방랑 덕분에 몇 군데에 원서를 밀어 넣었지만, 대학의 문턱은 야간이라 해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대 섞인 마음으로 기다렸던 1차 지망 대학들은 줄줄이 낙방이라는 쓰라린 결과를 보내왔다.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대학이야…’ 오기로 시작했던 마음에 서글픈 체념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쯤, 마지막 보루였던 2차 지망 대학의 발표 날이 찾아왔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턱걸이였는지 문을 닫고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간신히 그 견고한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내 이름 석 자를 걸치게 된 것이다.

합격 통지를 받던 순간, 공단 소극장의 컴컴한 무대 뒤편에서 “대학생이 아니면 안 된다”라며 선을 긋던 그들의 오만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봐라, 나도 간다. 대학이 별거냐.’ 비록 대단한 명문대도 아니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 꾸벅꾸벅 졸며 다녀야 하는 야간대학의 쪽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내 힘으로 벌어 내 학비를 내고, 내 오기로 쟁취해 낸 스무 살의 첫 승리였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입학식 날, 날씨는 아직 쌀쌀했지만 내 마음만큼은 화창했다. 조금은 조촐하게 치러진 야간대학의 입학식에는, 나를 눈치 안 보고 귀하게 키워준 내 엄마 같은 이모와 투덜거리면서도 원서를 대신 접수해 준 언니가 나란히 동행해 주었다.

강당에 모여 입학식 행사가 한창 진행되려는데,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준우가 제 고등학교 동창 녀석들을 몇 명 데리고 슥 나타난 것이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녀석답게, 가족들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어딘지 모르게 잔뜩 민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준우는 어색하게 축하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웅얼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우리… 학교 앞에서 놀고 있을 테니까 행사 끝나면 이리로 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우는 친구들을 이끌고 호다닥 사라져 버렸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풋풋하고 귀엽던지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지루한 입학식 행사가 모두 끝난 뒤, 이모와 언니를 먼저 배웅하고 준우를 찾아 학교 앞 골목을 서성였다. 번화가 골목을 걷다 보니 낡은 당구장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여기 있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매캐한 담배 연기와 초크 가루가 날리는 그 생소한 공간 한가운데에서, 준우와 친구들은 큠대를 쥐고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난생처음 발을 들여놓은 당구장이라는 공간은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무엇보다 웃음이 터진 건 그들의 실력이었다. 축하해 주러 온 멋진 친구들인 줄 알았더니, 하나같이 당구를 어찌나 못 치는지 눈을 뜨고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툭 치면 굴러가야 할 당구공이 준우와 친구들의 거친 큠대질에 퉁기더니, 갑자기 하늘로 슝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는 게 아닌가. 평생 보기 힘든 그 귀한 ‘공중부양 당구 쇼’를 눈앞에서 직관하며 나는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말수도 적고 인색한 준우가 나를 축하해 주겠다고 친구들까지 데려와 부려대던 서툰 객기. 녹색 당구대 위로 엉뚱하게 솟구치던 하얀 공처럼, 스무 살 우리의 대학 생활도 그렇게 예측 불가능하고 유쾌하게 굴러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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