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 소극장에서의 위선적인 대학생들을 보며 가슴속에 품었던 오기는 단단했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높고 견고했다. 내 상식 속에서 대학에 간다는 것은 당연히 지금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입에 풀칠할 숙식이야 어떻게든 해결한다 쳐도, 내게는 매달 비싼 등록금을 보태줄 든든한 부모님이나 지원군이 없었다. 오히려 그 시절에는 갓 스물을 넘긴 내가 버는 월급으로 언니의 대학 학비와 매달 쓰는 용돈까지 전부 부담하고 있던 처지였다. 집안의 가장 아닌 가장 노릇을 하던 내가 덜컥 회사를 그만두기엔 내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며 오기를 접으려던 찰나, 내 마음에 신선한 충격이 전해졌다. 나와 함께 입사했던 동기 녀석이 당당하게 야간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고 온 것이다.
‘아, 맞다! 낮에는 치열하게 일해서 돈을 벌고, 밤에는 눈을 빛내며 공부할 수 있는 야간대학이 있었지!’
닫혀 있던 벽에 갑자기 커다란 문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낮에는 회사원으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살겠다는 열망은 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코피를 쏟아가며 밤새워 독하게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원래 책상 앞에 진득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학구열을 불태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엉덩이가 워낙 가벼워, 사방이 꽉 막힌 독서실에서 책과 씨름하는 것 자체가 체질에 맞지 않는 얄미운 케이스였다.
하지만 시대가 나를 도왔던 것일까, 천운이었을까. 마침 예비고사가 폐지되고 시험이 오직 객관식으로만 출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뉴스를 듣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찍는 것도 하늘이 내린 실력이라면 실력이었기에, 나는 유독 주관식보다는 객관식 시험에 강한 동물적인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은 대책 없고 헐렁한 수험생 생활이 시작되었다. 틈틈이 책을 들여다보며 공부를 하다가도, 또 한동안은 공부고 뭐고 다 잊은 채 연락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철없이 구는 와중에도 체력장 날이 되면 준우가 학교 앞으로 슥 나타나곤 했다. 고생했다며 덤덤하게 사주던 따뜻한 밥 한 끼가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내가 뒤늦게 대학에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야, 대학이 뭐 별거라고 이제 와서 난리니?”라며 대놓고 반대하며 콧방귀를 뀌던 언니는, 정작 시험 당일 아침이 되자 두꺼운 목도리를 둘러매고 고사장까지 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나섰다.
“왜 귀찮게 따라와? 나 혼자서도 길 잘 찾아가.”
퉁명스레 뱉는 내 심술에 언니는 내 가방끈을 고쳐 매 주며 툭 한마디를 던졌다.
“너 이 기지배, 중간에 겁먹고 딴 길로 도망칠까 봐 그런다, 왜.”
말은 차갑고 투박했지만, 동생이 기어이 시험장 교실 의자에 앉아 시험지라도 마주하길 바라는 언니만의 눈물겨운 응원이었다.
웅성거리는 수험생들과 부모들로 가득 찬 교문에 들어서면서, 나는 언니의 등등한 등을 떠밀어 돌려세웠다.
“시험 끝나면 정문 앞으로 준우가 오기로 했어. 그러니까 언니는 끝나고 마중 안 와도 돼. 오지 마.”
사실 몇 일 전, 내가 어디서 시험을 보는지 은근슬쩍 캐물으며 궁금해하던 준우에게 시험장 앞에 와서 기다리라고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었다. 무뚝뚝한 성격이라 안 올 줄 알았는데, 녀석은 정색하며 정말로 가겠노라 약속했었다. 준우는 원래 말수도 적고,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감정 표현에는 참 인색하기 짝이 없는 남자기 때문이었다. 만나봐야 대단한 이벤트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이 소주나 몇 잔 마시며 종로와 명동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려서도, 가로등 불빛 흐릿한 큰길을 지나 한참을 더 으슥하게 걸어 들어가야 하는 우리 집 대문 앞까지 그림자처럼 묵묵히 데려다주는 것, 그게 우리 만남의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그 인색한 표현 속에 담긴 묵직한 다정함이 참 좋았다. 얼어붙은 교실 창밖으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학력고사 날 아침, 내 책상 위로 시험지가 배부되기 시작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교실 안에서, 나는 시험지 너머로 이 시험이 끝나면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교문 앞에 서 있을 준우의 작은 눈과 안경 쓴 얼굴을 떠올렸다. 스무 살의 춥고 서툴렀던 겨울, 대책 없던 내 도전의 길 끝에는 그렇게 나를 조용히 기다려주는 든든한 내 사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