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은 나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준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버렸다.
“도대체 그 친구에게 나를 뭐라고 말한 거야? 우린 대체 어떤 사이야?”
내 서슬 퍼런 질문에 준우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경철이가 너 좋아하잖아. 몰랐어?”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가슴이 쿵 내려앉았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경철이의 마음을 정말로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내게 경철이는 그저 준우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알게 된, 조금 더 자주 만나는 편한 ‘친구의 친구’일 뿐이었다. 준우와는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그저 활달하고 유머러스한 아이. 그 엉뚱한 고백의 전말을 알게 된 자리에는 다시금 깊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준우는 경철이의 마음을 핑계 삼아 내 시선을 피했고, 나는 그의 비겁하면서도 서글픈 태도에 입을 닫아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희한한 관계였다. 우리는 그 흔한 “사랑한다”는 고백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헤어지자”는 이별의 말 한마디조차 나눈 적이 없다. 남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죽도록 싸워본 적도 없었다. 그저 풀어진 태엽 인형처럼, 서로에게 아무런 다짐도 요구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무덤덤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멀어지는 것도, 붙잡는 것도 아닌 애매한 경계 위에서 우리의 스무 살은 조금씩 마모되어 갔고, 그렇게 연락이 끊긴 채 계절이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학교 1교시 수업이 막 끝났을 때, 과 동기 녀석이 대뜸 내 자리로 다가와 메모를 건넸다.
“야, 아까 준우 씨한테서 연락 왔었어. 너한테 꼭 전해 달래. 기다릴 테니까 수업 끝나고 신촌으로 와줄 수 있냐고.”
“준우가? 왜 직접 전화 안 하고?”
“네 전화번호를 잊어버렸대. 내일 군대 입대하나 봐.”
입대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언젠가 학교 앞 주점에서 친구들과 누군가의 입대를 격려하기 위해 다 같이 술을 마시던 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준우는 내게 툭 한마디를 던졌었다.
‘너 시집가면 난 군대 갈 거야.’ 자의가 아냐 타의로
자의가 아닌 타의로 끌려가야 하는 군대이거늘, 내가 시집을 간 것도 아닌데 지금 그는 자의로 입대를 하겠다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갈까, 말까. 책상에 앉아 애꿎은 노트 종이만 찍찍 찢어내며 한참을 망설였다. 이미 마음의 거리는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일 군대를 간다는 그 한마디에 발걸음은 어느새 조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약속 장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만취해 버린 준우와 얼굴만 겨우 아는 그의 과 친구들, 그리고 묘하게도 경철이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문가에 선 나를 발견한 준우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표정으로 붉어진 얼굴을 들어 올리며 친구들에게 외쳤다.
“거봐! 내가 올 거라고 했잖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준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이블 위로 툭 쓰러졌다. 평소 술이 꽤나 센 편이었던 녀석인데, 입대를 앞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얼마나 퍼마셨는지 완전히 축 늘어져 정신을 못 차렸다. 동기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가누는 와중에도, 준우는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물었다.
“내일…… 청량리역에서 기차 타거든. 올 수 있겠냐?”
“……가능하면 갈게.”
짧게 답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사실 그 시절의 나는 바보같이 군대가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이 땅에서 남자로 태어난 게 얼마나 대우받는 일인데, 시험 쳐서 뽑혀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야말로 신청하는 ‘선착순’이잖아?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게 유세를 떨며 진탕 마셔대나 싶어 속으로 은근히 툴툴거리기도 했었다.
그가 내일 타는 기차가 어디로 향하는 기차인지도 몰랐다. 논산인지 춘천인지, 그가 가게 될 부대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으며, 신병훈련이라는 게 얼마나 고되고 무서운 것인지조차 전혀 무지했다. 그저 내일이면 이 무뚝뚝하고 서툰 남자가 내 눈앞에서 영영 사라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슬픔만이 차올랐다.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그가 탄 청량리발 입대 기차의 궤적을 묵묵히 따라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